자동차/컬럼

소설보다 재밌는 폭스바겐 이야기

오토앤모터 2010. 6. 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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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의 탄생 배경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가장 극악무도했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어른 2명에 아이 3명이 탈 수 있고, 리터당 14.5km의 연비로 시속 100km이상을 달리고, 정비가 쉽고 값싼 차’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바로 ‘독일 국민 1가구당 1대의 차’라는 모토로 국민차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죠. 이것이 폭스바겐의 시초가 된 것인데요,
‘폭스바겐’이란 이름도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국민의 차’란 뜻입니다.

당시 기술력으로 어려울 것만 같았던 임무를 맡은 것은 천재적인 자동차 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쉐’였습니다.
그는 3년여 만에 ‘비틀’의 원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임무를 완수해냈습니다.

자동차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포르쉐 박사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비틀’의 원형은 군용차로 개조되어 활용되기 시작했죠. 그러나,전세가 역전되어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독일은 패전의 멍에를 쓰고 피폐화됩니다. 물론 폭스바겐의 자동차 생산공장 역시도 폭격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스바겐은 전쟁으로 무너진 독일 재건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연합군이던 영국군에서 비틀의 원형을 개조한 군용차를 주문하면서 월1000대 이상 생산하는 등 회사 재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죠.

독일의 국민차로 생산되었던 비틀



1945년 국영회사로 시작한 폭스바겐은 1948년 비틀을 정식생산하며, 독일 최대의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화된 국토 뿐 아니라, 참전국들에 대한 피해보상금 등으로 막막했던 독일은 폭스바겐을 통해 회생의 기회를 찾았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인 사실만으로도 폭스바겐은 진정한 ‘국민차’로써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후 폭스바겐은 세아트,스코다,부가티,람보르기니,벤틀리,아우디 등 세계 유수의 메이커들을 인수하면서 유럽 최대의 자동차 그룹으로 부상하기도 했으나,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국민차’를 모토로 실용성이고 대중적인 중소형차 중심의 모델 생산을 하다 보니, 수익성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또한 당시 소비자들의 트랜드를 만족시키기 위해 앞다투어 고급화를 선언하던 자동차 업체들과의 싸움에서도 불리할 수 밖에 없었죠. 더불어 세계적인 자동차 업체에 메이커를 대표할만한 ‘기함’모델이 없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습니다.

결국 폭스바겐은 자사의 기함 ‘페이톤’을 내놓는데요.
당시 페이톤은 폭스바겐 역사상 가장 럭셔리하면서, 가장 중후한, 그러면서도 폭스바겐의 기술력이 모두 집약된 모델이었습니다.

폭스바겐이 내놓은 기함, 페이톤


페이톤은 독일 드레스덴 지역의 2만5천평 부지에 ‘투명 유리 공장’을 짓고 생산된다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폭스바겐 내 최고의 장인들이 90% 이상 수작업을 통해 제작되기에 하루 30대 이내로 생산된다고 밝혔고, 개발 단계부터 페이톤 만을 위해 100개 이상의 새로운 특허를 받았을 정도로 편의사항 역시 여타 프리미엄 세단에 비해 뒤지지 않았죠.

드레스덴 투명 유리공장

유리공장에서 생산되는 페이톤



하지만, 폭스바겐의 이미지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할 이미지 리딩 모델이자, 기함으로써 플래그쉽 모델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닌 페이톤은 생산 직후 판매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다. 이유는 최고급만을 추구하는 프레스티지 고객들이 가지고 있던 ‘대중적인 폭스바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페이톤의 베이스를 벤틀리의 플라잉스퍼,컨티넨탈 GT와 공유함은 물론 아우디 A8와는 파워트레인까지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페이톤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2006년 판매부진으로 북미시장에서 페이톤을 철수시키게 되는데, 철수 이후 최고급모델인 W12모델의 중고차 가격이 판매 당시 신차가격을 역전하면서 페이톤의 진가가 새롭게 재조명받기도 했답니다.<수입차 전문 블로그 - 오토앤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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